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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불량자 누범과 살아준 아내.. "고맙습니다."

신광교회 아버지학교 간증문, 모현동 김재홍 '3교구51구역'

등록일 2006년09월28일 00시00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 학교의 과제를 핑계로 케케 묵은 권위주의와 체면을 접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첫 주에는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께도 편지를 썼습니다. 익산 아버지 학교의 힘이지요. 아내에게는 아마도 결혼 후 처음 쓴 것 같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더러 편지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답장을 쓰지 않았습니다. "말이 꼭 필요하냐, 그저 마음을 헤아려 보면 알 일이 아니냐"면서 대화를 거부한 가정생활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심전심이라는 미덕을 내세우면서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밖에서 치열하게 부딪치면서 일한 뒤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가는 대부분의 한국 가장들에게 ‘군말을 안하는 군자의 도’는 얼마나 좋은 도피수단이었습니까. 저도 그 허울좋은 군자의 보호막 뒤에 숨어서 지내온 셈입니다.
그러나 저의 과묵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도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해 온 사람들이 흔히 갖는 실어증이랄까 시니컬리즘 같은 증세입니다. 제가 살아 온 길을 돌이켜 보면 정말이지 저의 노력, 저의 진심을 인정받지 못한 채 소외당해 왔습니다. 나름대로 바르고 정의롭게 살겠다는 철학을 실천하려고 진력했는데 그것이 더욱 억압받는 죄가 되곤 했습니다. 1970~80년대 이른바 사회적 주류와 정치권력으로부터 받는 탄압이었습니다.
그런 억울한 일이 총체적으로 집중된 사건이 바로 아내와의 결혼 때 제게 닥쳤습니다. 우리는 1984년 6월16일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저의 어줍잖은 인생철학으로 보아도 결혼식은 양가의 가족과 친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원만하고 행복한 분위기 속에 치러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손에 잡히지 않은 채 무지개처럼 잠시 떴다가 사라졌습니다. 처가 쪽이 우리의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차원을 넘어 결혼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처음엔 저도 처가쪽의 반대 이유를 이해했습니다. 제 자신의 ‘신원조회’ 사항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고 여겨야 했습니다. 우선 당시 저는 강제해직 기자로 실직자였습니다. 1980년 동아일보 3년차 기자이던 때 자유언론 선언과 광주시민항쟁 보도 운동을 벌이다가 전두환 노태우 씨의 신군부에 의해 언론계에서 축출된 것입니다. 그후 모교인 서울대 정치학과의 박사과정에 시험 쳐 들어갔지만 학생 신분에 불과했습니다. 학교에서 대학신문사 편집국장 자리를 주고 월급도 상당 수준 받았지만 그것이 안정적인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 그래도 낭만적이던 후배들이 노총각을 장가보내자며 저에게 대학원생인 아내를 소개시켰습니다. 서울 토박이로 같은 대학 후배인 아내는 처음엔 장난기가 좀 보였습니다. 시골 티가 몸에 뱄지만 7년이나 선배인 저를 놀리려 들었습니다. 우리는 곧 매우 뜨거운 열애에 빠져 들었습니다. 불문학도인 아내는 프랑스에 유학을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어 교사가 없는 고교를 다녀 기초도 모르던 저는 ‘새로이 불어 공부를 해서라도 함께 갈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저의 신원조회엔 또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하고 군대 강제입영한 전력도 따라다녔습니다. 1971년 10월15일 박정희 정권이 위수령을 발동했을 때 저는 서울대 문리대 대의원의장으로 대학 캠퍼스에서 체포당했습니다.
학생간부 때 저는 대학을 보호하는 방어벽 노릇도 했었습니다. 총장실 점거나 시험 거부 같은 것에 반대하면서 “우리의 상대는 외부의 독재정권”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군대가 진주하는 상황에서 학교가 저를 보호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경찰에서 일주일, 중앙정보부에서 2박3일 고문조사를 받은 뒤 군대로 끌려갔습니다. 신성한 국방 의무를 그렇게 엉겁결에 벌 받는 식으로 치른 것입니다. 군대 생활이 하도 고달퍼서 일요일만이라도 함께 끌려 온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저는 군인 교회 반에 줄을 섰습니다. 고등학교 1,2학년 때 신광교회를 다니다가 대학 진학 후 그만 신앙생활을 놓쳐 버린 저는 그 군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강원도 화천군의 그 군인 교회엔 우리를 감시하는 보안대원들도 바쁘게 드나들었지요.
그러니까 저는 대학 때 학생운동으로 제적생이었고 졸업 후 당시엔 1등 신문사에 들어갔지만 자유언론 운동을 하다가 쫓겨 난 강제해직 기자였습니다. 신원불량자 누범인 셈이었습니다.
더구나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 전라도가 고향인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는 족쇄를 찼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공 정권의 서슬이 시퍼렀던 당시 그런 사람이 양지 아래서 살아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아내는 우리의 결혼식 일주일전에 가출을 단행했습니다. 자취하는 친구 집에 숨어 있다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양가 중 한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혼식장 파괴위협 때문에 친구들과 동아일보 후배기자들이 경비를 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외아들의 그런 결혼을 흔쾌히 받아드려주신 아버지와 어머지께 마음 속 깊이 감사했습니다. “그래, 건강하고 능력있는 젊은 놈은 맨 몸으로 결혼하는 거다”고 하신 부모님이 무한히 자랑스러웠습니다.
결혼 후 저는 아내에게 다짐을 받았습니다. “내가 동의할 때까지 친정 쪽과 화해하거나 왕래해선 절대 안된다” 아내는 그것 때문에 눈물의 신혼 생활을 보내야 했습니다. 첫 아이가 태어날 때 장모님이 오겠다고 했지만 저는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3년 뒤 둘째 아이를 출산할 때도 저는 처가 쪽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냉혈한이 돼 버린 내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놀랐지만 달리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그때 가슴이 멍 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결혼 때 그랬던 만큼이나 한이 맺혔으리라 짐작합니다. 둘째가 태어나고 1년 후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처가에 처음으로 세배를 갔습니다. 결혼 후 4년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신혼 생활 속에서 우리의 행복을 말하기 어려웠고 아내의 가슴에 회한의 상처도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저에겐 매우 좋은 기회이던 하버드대 유학생활도 서로 한풀이라도 하듯 다투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아내가 셋째 아이를 가졌을 때 저는 모든 것을 다해 주겠노라고 약속했음에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고 아내도 제게 공격적이었습니다.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이란 말을 할 줄 몰랐던 제가 죄인입니다. 저는 아내가 40여권에 이르는 프랑스 문학작품들을 번역 출판하는 동안 그럴 듯한 출판기념회 한 번 해 준 적도 없습니다. 아니 아내가 번역한 소설책을 한 권도 제대로 다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반려자가 아니었던 셈이지요.
요즘 아버지 학교에 다니면서 허그를 하자 아내는 좋아하는 눈치입니다. 아이들과도 허그하는 저를 보면서 무언가 신기한 변화를 대하는 표정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있고 허그라는 행동이 있는 줄 알지만 제 자신 그것을 실천하면서 정서적으로 새로운 느낌을 진하게 받습니다.
저는 9월 한달을 자기혁신과 자기개조의 시간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1개월로 끝날 일이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혁신과 업그레이드를 위해 끊임없이 땀 흘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서가 매마른 냉혈한이 돼 버린 것 아닌가 걱정되던 제가 아버지학교 형제들에게 아내와의 사연을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소박한 희망, 일상의 행복 찾기에 전폭적으로 함께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나 봅니다. 지금까지의 의정활동에 대한 심판과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소서.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겠나이다.
아멘.

이 기고문은 신광교회에서 열린 '아버지학교'에 참가했던 국회의원 김재홍님의 간증문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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