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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인간 사이에서

자신의 허물을 벗는 가을을 맞이하여 자연 속에 묻힌 것들을 생각하다

등록일 2006년10월19일 00시00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2006년 가을입니다.
신호등 색깔로 비유하면
노랑색입니다.
성장과 결실의 초록색에서
조락과 추위의 빨간색으로
넘어가는 달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벗고
주위 이웃을 둘러보고
건강을 챙기며
월동준비를 하는
계절입니다.

또,

우리의 국토는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그저 하늘과 산하만
물끄러미 바라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고 행복합니다.

이 사이에

사랑은 소리 없이
와 닿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파란하늘을 올려다보세요. 얼마나 맑고 청아합니까? 우리나라의 가을하늘은 세계 어느 곳에 그 자체로 출품하여도 빼어납니다. 황금들녘을 바라보세요. 태양빛을 받아 매우 아름답게 출렁이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야에서만 조감할 수 있는 노란 물감으로 수놓은 산수화요 일대 장관입니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산을 가보세요. 방긋방긋 벌어진 입을 오므릴 수가 없습니다. 그 아기자기함이 유럽의 알프스 산이나 미국의 요세미티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가을의 하늘은 하늘이요 들은 들이며 산은 산입니다. 이 가을의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지 한번 들여다볼까요.

풋과일이 익으면 인간에게 보는 즐거움과 먹는 맛을 알게 해줍니다. 또, 씨앗을 뿌리게 하기 위해서 열매를 맺어줍니다. 사람도 남여 결합을 통하여 후손들을 번식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유전자를 물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덜 익은 아이가 태어나면 사회와 나라를 망국의 길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올바른 가치관과 사상 정립은 산 사람들의 몫입니다. 무르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자라던 벼가 누렇게 익으면 땅을 보고 고개를 숙입니다. 하지만 세인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낮은 사람들을 짓밟으며 높이높이 올라서려고만 합니다. 인생의 말로가 걱정됩니다. 권력자에게는 거북이처럼 납작 엎드리기도 하고 추풍낙엽(秋風落葉)이 되기도 합니다. 수상한 시절에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람은 현명한 분입니다. 지금은 금전이나 지위적으로 손해 볼지 모릅니다. 허나 한 인간의 평생 업적은 물량적인 것만이 척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올 곧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나의 삶은 내 몫입니다.

추수를 끝낸 빈들은 꽉 들어차면 비워야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야만 다음 계절에 수확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당히 벌거벗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순환의 법칙에 의하여 먹으면 배출해야 합니다. 너무 많이 먹으면 만병의 근원이 되지요. 무릇 흘러서 넘치는 것은 부족한만 못하다 했던가요. 많은 것을 소유하기보다 베풀어야 오히려 더 큰 인생의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잎들이 떨어져서 가을바람에 나뒹굽니다. 이는 겨우내 추위를 견뎌내고 봄에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자기 허물벗기입니다. 달도 차면 기울고 다시 떠오릅니다. 해도 중천에 떠오르면 지고, 아침에 붉게 빛납니다. 세속의 사람들도 욕심과 이기심을 벗어놓고 나눔과 사랑으로 채워 질 때 인생이 가랑잎 같은 가벼운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가끔 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날씨가 춥다는 것은 미리미리 건강관리와 겨울나기를 준비하라는 하늘의 뜻입니다.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환절기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병마에 휘청거리거나 죽는 것도 자연의 이치이자 하늘의 경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신하지 말고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족과 사회가 건강해집니다.

황량한 들판을 보고 문득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나온 농사과정(씨 뿌리고, 거름 주고, 김 메고, 물주고, 키우고…)을 뒤돌아보며 인생을 반추하라는 것입니다. 소는 여물을 먹고 나서 다시 뱉어내어 되씹은 후 소화를 시킨다고 합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과거를 뒤돌아보고 자성의 계를 세우지 않는다면 소만도 못한 미물이 되겠지요.

산하의 오색영롱한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탄성을 연호합니다. 자연이 그대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무릇 매사의 인생도 그러해야 합니다. 단풍이 든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색소가 더 해지는 것이 아니라 엽록소가 빠지면서 녹색을 잃고서 울긋불긋하게 보이는 현상이 단풍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도 물질 만능의 거품이 빠져야 민족 본래의 순수성을 되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적한 시골의 어느 집 감나무에 서 너 개의 감이 달려있습니다. 이 감을 보고서 따고 싶다는 충동도 일겠지만, 새의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산천초목의 뭇 생명이 모두 소중함을 느끼게 합니다. 보시란 조건이 없고, 소리 없이 이루어 질 때 감동의 물결이 멀리 멀리 파장을 일으켜 나갈 것입니다.

농부가 콤바인으로 탈곡하고 난후 들녘에 볏짚이 널브러져 있으면 명년의 땅심을 돋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볏짚을 묶고 있다면 한우의 겨울양식을 마련하기 위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추수가 끝난 논에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2모작을 통한 농가소득 증대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농부가 베짱이처럼 쉬고 있을 때 근면한 농사꾼이 개미처럼 일하는 모습은 우리의 국민성입니다. 그 후손들도 닮을 것입니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모습은 경건합니다. 하지만 부동산투기로 억대 자산을 증식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세금은 적게 내려 하는 불로소득자들도 있습니다. 누가 국가에 애국과 충성하는 자요, 백배나 소중한 국민입니까?

대추는 조상들이 조상에게 열망하는 바람입니다. 모든 과일은 비바람이 불면 낙화가 되어 열매를 맺지 못하나 대추는 비바람이 치면 칠수록 주렁주렁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인생살이가 어찌 파란만장이 없겠습니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또 산이 있을지라도 세파에 시달리면 시달릴수록 삶의 결실을 대추처럼 맺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입니다. 우리네 부모님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계절이 떠나감을 아쉬워하는 것은 인생에 밝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삶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살아가라는 변환의 징표입니다.

땅은 정직합니다. 뿌리고 가꾼 대로 거두어들입니다. 적게 가꾸면 적게, 많이 가꾸면 많게 거두어들입니다. 또, 심혈을 기울여 키운 만큼 수확을 합니다. 논에 간 횟수만큼 수확의 양은 달라집니다. 사람은 정직한 자도 있고 거짓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는 격언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땅을 스승으로 섬긴다면 이 사회는 한층 신뢰감이 두터워질 것입니다. 땅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지언정 결코 사람을 배반하지는 않습니다.

그 옛날 율곡 선생님은 담 너머로 떨어진 밤을 주워서 옆집으로 던져주었다고 합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탐욕을 부리지 않고 오히려 주인을 찾아주는 모습은 흐뭇하게 합니다. 콩 한쪽도 밤 한 톨도 떳떳하게 나누기 어려운 시대에 이 계절을 아름답게 빛내줍니다. 밤이 없었다면 이이 선생님의 너그러움도 엿볼 수 없었겠죠.
제사상의 첫줄의 좌측에서 두 번째에 놓여 있는 밤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씨앗은 땅에 묻으면 떡잎이 되어 올라오나 밤은 먼저 뿌리가 생기고 그 뿌리에서 줄기가 뻗어 올라 잎이 피어납니다. 밤은 땅속에서 썩어 밤나무의 자양분이 되어줍니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과 같으니 자신의 모든 것을 썩히고 태워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은덕을 잊지 말라고 제사상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파트 옆집의 청국장 냄새를 맡고 고약하게 생각하기보다 어려서 메주(요즘 아이들은 콩이 메주가 됨을 잘 알지 못합니다.)를 만들어 마루에 걸어놓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면 가족에 대한 따스한 정과 그리움이 남아있다는 신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시적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얼마나 기억하고 살아갈까요. 가족은 5천년 역사를 지탱해온 대들보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국가사회의 존망이 위태롭습니다. 최후의 보루를 사랑과 화목으로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밭의 파릇파릇한 배추, 무, 상추, 파 등은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족의 건강과 국력을 키워주는 생명초입니다. 흔히 상추쌈을 해서 먹으면 식욕이 돋는다고 합니다. 밥을 먹고 상추를 먹건 상추를 싸서 입에 넣은 후 밥을 먹건 먹는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상추에 밥과 반찬을 넣어 싸서 먹으면 ‘맛이 좋다’하는 것은 자연이 준 선물입니다. 그 미각효과를 먹음으로써 느끼는 것이겠고요. 채소밭과 아울러 마음의 밭도 알뜰살뜰하게 가꾸어야 사회가 풍족해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 속에서 한 권의 책을 읽고 감탄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통한 정신적 성숙을 드높이는 성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왜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가? 서양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사고하지 않으면 존재가치를 느낄 수 없는 것이 10월의 하늘이요 땅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지만 감심은 데서는 감이 나지 않고 돌감나무가 됩니다. 감이란 원래 고염나무가 자라면 밑 둥지를 잘라내고 접목을 하는 식물입니다. 자식이 자랄 만큼 자라면 단호하게 밑동을 잘라내고 부모가 열망하는 자식상, 국가가 희망하는 국민상, 역사가 요구하는 인간상으로 접목을 하여 교육을 해야 합니다. 제사상에 감이나 곶감을 올리는 것은 바로 민족의 미래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름다움의 전부는 아닙니다. 내면의 세계에서 끌어 나오는 심오한 마음으로 바라 볼 때 자연의 현상과 본질, 인간의 사회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귀의합니다. 결국 자연을 떠나서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참모습은 무엇일까요? 각자 마음속에서 자문자답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명상(瞑想)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파란하늘을 올려다보세요. 얼마나 맑고 청아합니까? 우리나라의 가을하늘은 세계 어느 곳에 그 자체로 출품하여도 빼어납니다. 황금들녘을 바라보세요. 태양빛을 받아 매우 아름답게 출렁이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야에서만 조감할 수 있는 노란 물감으로 수놓은 산수화요 일대 장관입니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산을 가보세요. 방긋방긋 벌어진 입을 오므릴 수가 없습니다. 그 아기자기함이 유럽의 알프스 산이나 미국의 요세미티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가을의 하늘은 하늘이요 들은 들이며 산은 산입니다. 이 가을의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지 한번 들여다볼까요.

풋과일이 익으면 인간에게 보는 즐거움과 먹는 맛을 알게 해줍니다. 또, 씨앗을 뿌리게 하기 위해서 열매를 맺어줍니다. 사람도 남여 결합을 통하여 후손들을 번식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유전자를 물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덜 익은 아이가 태어나면 사회와 나라를 망국의 길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올바른 가치관과 사상 정립은 산 사람들의 몫입니다. 무르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자라던 벼가 누렇게 익으면 땅을 보고 고개를 숙입니다. 하지만 세인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낮은 사람들을 짓밟으며 높이높이 올라서려고만 합니다. 인생의 말로가 걱정됩니다. 권력자에게는 거북이처럼 납작 엎드리기도 하고 추풍낙엽(秋風落葉)이 되기도 합니다. 수상한 시절에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람은 현명한 분입니다. 지금은 금전이나 지위적으로 손해 볼지 모릅니다. 허나 한 인간의 평생 업적은 물량적인 것만이 척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올 곧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나의 삶은 내 몫입니다.

추수를 끝낸 빈들은 꽉 들어차면 비워야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야만 다음 계절에 수확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당히 벌거벗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순환의 법칙에 의하여 먹으면 배출해야 합니다. 너무 많이 먹으면 만병의 근원이 되지요. 무릇 흘러서 넘치는 것은 부족한만 못하다 했던가요. 많은 것을 소유하기보다 베풀어야 오히려 더 큰 인생의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잎들이 떨어져서 가을바람에 나뒹굽니다. 이는 겨우내 추위를 견뎌내고 봄에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자기 허물벗기입니다. 달도 차면 기울고 다시 떠오릅니다. 해도 중천에 떠오르면 지고, 아침에 붉게 빛납니다. 세속의 사람들도 욕심과 이기심을 벗어놓고 나눔과 사랑으로 채워 질 때 인생이 가랑잎 같은 가벼운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가끔 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날씨가 춥다는 것은 미리미리 건강관리와 겨울나기를 준비하라는 하늘의 뜻입니다.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환절기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병마에 휘청거리거나 죽는 것도 자연의 이치이자 하늘의 경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신하지 말고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족과 사회가 건강해집니다.

황량한 들판을 보고 문득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나온 농사과정(씨 뿌리고, 거름 주고, 김 메고, 물주고, 키우고…)을 뒤돌아보며 인생을 반추하라는 것입니다. 소는 여물을 먹고 나서 다시 뱉어내어 되씹은 후 소화를 시킨다고 합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과거를 뒤돌아보고 자성의 계를 세우지 않는다면 소만도 못한 미물이 되겠지요.

산하의 오색영롱한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탄성을 연호합니다. 자연이 그대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무릇 매사의 인생도 그러해야 합니다. 단풍이 든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색소가 더 해지는 것이 아니라 엽록소가 빠지면서 녹색을 잃고서 울긋불긋하게 보이는 현상이 단풍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도 물질 만능의 거품이 빠져야 민족 본래의 순수성을 되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적한 시골의 어느 집 감나무에 서 너 개의 감이 달려있습니다. 이 감을 보고서 따고 싶다는 충동도 일겠지만, 새의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산천초목의 뭇 생명이 모두 소중함을 느끼게 합니다. 보시란 조건이 없고, 소리 없이 이루어 질 때 감동의 물결이 멀리 멀리 파장을 일으켜 나갈 것입니다.

농부가 콤바인으로 탈곡하고 난후 들녘에 볏짚이 널브러져 있으면 명년의 땅심을 돋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볏짚을 묶고 있다면 한우의 겨울양식을 마련하기 위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추수가 끝난 논에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2모작을 통한 농가소득 증대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농부가 베짱이처럼 쉬고 있을 때 근면한 농사꾼이 개미처럼 일하는 모습은 우리의 국민성입니다. 그 후손들도 닮을 것입니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모습은 경건합니다. 하지만 부동산투기로 억대 자산을 증식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세금은 적게 내려 하는 불로소득자들도 있습니다. 누가 국가에 애국과 충성하는 자요, 백배나 소중한 국민입니까?

대추는 조상들이 조상에게 열망하는 바람입니다. 모든 과일은 비바람이 불면 낙화가 되어 열매를 맺지 못하나 대추는 비바람이 치면 칠수록 주렁주렁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인생살이가 어찌 파란만장이 없겠습니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또 산이 있을지라도 세파에 시달리면 시달릴수록 삶의 결실을 대추처럼 맺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입니다. 우리네 부모님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계절이 떠나감을 아쉬워하는 것은 인생에 밝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삶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살아가라는 변환의 징표입니다.

땅은 정직합니다. 뿌리고 가꾼 대로 거두어들입니다. 적게 가꾸면 적게, 많이 가꾸면 많게 거두어들입니다. 또, 심혈을 기울여 키운 만큼 수확을 합니다. 논에 간 횟수만큼 수확의 양은 달라집니다. 사람은 정직한 자도 있고 거짓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는 격언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땅을 스승으로 섬긴다면 이 사회는 한층 신뢰감이 두터워질 것입니다. 땅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지언정 결코 사람을 배반하지는 않습니다.

그 옛날 율곡 선생님은 담 너머로 떨어진 밤을 주워서 옆집으로 던져주었다고 합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탐욕을 부리지 않고 오히려 주인을 찾아주는 모습은 흐뭇하게 합니다. 콩 한쪽도 밤 한 톨도 떳떳하게 나누기 어려운 시대에 이 계절을 아름답게 빛내줍니다. 밤이 없었다면 이이 선생님의 너그러움도 엿볼 수 없었겠죠.
제사상의 첫줄의 좌측에서 두 번째에 놓여 있는 밤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씨앗은 땅에 묻으면 떡잎이 되어 올라오나 밤은 먼저 뿌리가 생기고 그 뿌리에서 줄기가 뻗어 올라 잎이 피어납니다. 밤은 땅속에서 썩어 밤나무의 자양분이 되어줍니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과 같으니 자신의 모든 것을 썩히고 태워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은덕을 잊지 말라고 제사상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파트 옆집의 청국장 냄새를 맡고 고약하게 생각하기보다 어려서 메주(요즘 아이들은 콩이 메주가 됨을 잘 알지 못합니다.)를 만들어 마루에 걸어놓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면 가족에 대한 따스한 정과 그리움이 남아있다는 신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시적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얼마나 기억하고 살아갈까요. 가족은 5천년 역사를 지탱해온 대들보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국가사회의 존망이 위태롭습니다. 최후의 보루를 사랑과 화목으로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밭의 파릇파릇한 배추, 무, 상추, 파 등은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족의 건강과 국력을 키워주는 생명초입니다. 흔히 상추쌈을 해서 먹으면 식욕이 돋는다고 합니다. 밥을 먹고 상추를 먹건 상추를 싸서 입에 넣은 후 밥을 먹건 먹는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상추에 밥과 반찬을 넣어 싸서 먹으면 ‘맛이 좋다’하는 것은 자연이 준 선물입니다. 그 미각효과를 먹음으로써 느끼는 것이겠고요. 채소밭과 아울러 마음의 밭도 알뜰살뜰하게 가꾸어야 사회가 풍족해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 속에서 한 권의 책을 읽고 감탄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통한 정신적 성숙을 드높이는 성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왜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가? 서양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사고하지 않으면 존재가치를 느낄 수 없는 것이 10월의 하늘이요 땅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지만 감심은 데서는 감이 나지 않고 돌감나무가 됩니다. 감이란 원래 고염나무가 자라면 밑 둥지를 잘라내고 접목을 하는 식물입니다. 자식이 자랄 만큼 자라면 단호하게 밑동을 잘라내고 부모가 열망하는 자식상, 국가가 희망하는 국민상, 역사가 요구하는 인간상으로 접목을 하여 교육을 해야 합니다. 제사상에 감이나 곶감을 올리는 것은 바로 민족의 미래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름다움의 전부는 아닙니다. 내면의 세계에서 끌어 나오는 심오한 마음으로 바라 볼 때 자연의 현상과 본질, 인간의 사회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귀의합니다. 결국 자연을 떠나서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참모습은 무엇일까요? 각자 마음속에서 자문자답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명상(瞑想)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 채수훈- 어양동 사회복지 전담공무원, 원광보건대학 사회복지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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